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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허스톤 목사가 본 ~

교회창립 45주년 특집 - 존 허스톤 목사가 본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4)

통역자에서 당당한 동역자로


 우리는 마침내 1960년 겨울 아주 추운 날 한국에 돌아왔다. 아내 맥신과 일곱살 된 딸 캐런과 함께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숙소로 가서 선교사들을 만났다. 우리는 선교사 숙소로 가져온 은빛색의 스팔탄 이동주택 차량에 거주하며 그들과 함께 사역계획을 논의했다. 선교사들은 이동주택을 세워놓을 장소를 알려주었다. 조용기 전도사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나와 아내 맥신은 조 전도사를 만나기를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캐런을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옷을 뚫고 지나가는 가운데 눈 위를 걸어갔다. 우리는 조 전도사가 살고 있다고 들었던 한옥 집 문을 두드렸다. 상냥해 보이는 중년 부인이 문을 열더니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한국말로 크게 소리쳤다. 얼마 후 조 전도사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물었다. “허스톤 목사님 맞습니까?”
 조 전도사를 다시 만나니 너무나 반가왔다. 맥신을 소개하자, 조 전도사는 중년 부인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 최자실 전도사였다. 

 따스한 손과 마음
 우리가 한국식 온돌방에 들어가 앉았을 때, 아내 맥신은 몸을 떨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한옥은 석탄을 때는 온돌난방을 하고 있다. 최자실 전도사는 맥신의 손이 차가운 것을 보자 아내의 손을 아랫목에 놓고 따뜻해질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덮어주었다.
 우리는 무사히 한국에 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기도하였다. 나는 그동안 그들이 겪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두 사역자는 같은 신학교에 다녔으며, 1957년 겨울 조용기 학생은 아주 강한 독감으로 심하게 병들게 되었다. 전직 산파였던 최자실 학생은 15일 동안 그를 간호하며 기도해 주었고, 그 이후로 그들은 아주 가깝고 강한 연대의식을 갖게 되었다.
 두 사역자의 나이 차이와 조용기 학생의 불교도 부모님이 멀리 사는 관계로 조용기 학생은 최자실 학생을 어머니로, 최자실 학생은 조용기 학생을 아들로 불렀다. 두 사람은 몇 년 뒤 최 전도사의 딸 성혜 그레이스가 조 전도사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였다.
 조용기 학생과 최자실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자주 파고다 공원 근처에 나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찬양을 부르며 복음을 전파했다. 최자실 학생은 조용기 학생의 지성과 복음에 대한 헌신을 존중하였고, 조용기 학생은 최자실 학생의 흔들리지 않는 끈기있는 기도에 감탄하고 있었다.
 수년 전 힘든 시기에 최자실 학생과 남편이 한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관리가 되었고, 감사의 마음으로 공동묘지 옆에 있는 1만평방미터의 땅을 최자실 전도사에게 주었다. 그 땅은 선교사 숙소 근처 대조동이라고 불리는 서울 변방의 빈민지역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도사는 가까이에 있는 고아원에 지원을 하였으나, 고아원이 다른 지원자를 원하는 바람에 뽑히지 못하였다. 그래서 최 전도사는 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서 주일학교를 하며, 그 땅 위에 시멘트 블록으로 집을 짓고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자신이 담임교역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 전도사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은 그를 돕는 협력사역자가 되기를 원했다. 1958년 여름, 최자실 전도사는 조 전도사에게 자신의 교회 창립예배 설교를 부탁하였다. 단 다섯명만이 대조동의 작은 집 거실에서 조용기 전도사의 첫 설교를 들었다. 최자실 전도사, 그의 자녀 셋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어온 나이든 과부가 그들이었다. 강단은 사과궤짝을 얇은 천으로 씌운 것이었다. 조 전도사가 설교를 하는 동안 피곤했던 과부는 잠이 들었고,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조 전도사는 거의 자리를 떠나올 뻔하였다.

 늘어나는 성도
 그 후 몇 달 동안 조 전도사는 고향으로 가는 열차표를 사기 위해 서울역을 향하면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신실한 목회 파트너였던 최자실 전도사가 그를 따라다니며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한번도 기차를 타지 못했다.
 조 전도사는 여름 부흥회 동안 나의 통역을 도운 뒤, 병자를 위한 기도에 전심하였다. 그와 최 전도사는 새로 시작한 교회가 일어설 수 있도록 매일 간절한 기도 가운데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내어 던지다시피 하였다.
 최자실 전도사는 다 낡은 군 천막을 사다가 그 땅 위에 세우고, 교회성장을 준비하였다.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그들은 빈 가스통을 종 삼아 두드리며 불어나는 성도들을 새벽기도에 불렀다. 나머지 일과는 그들이 사는 빈민지역의 가정을 방문하며, 말씀을 전하며 기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천막 안에서는 언제고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은 조용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다른 한편은 최자실 전도사를 중심으로 팀을 이루어 가정을 방문하며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조용기 전도사는 점점 늘어나는 자신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폐병을 고쳐주셨으며 지금도 그들에게 똑같은 치료를 하신다고 말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성령께서 돌파구를 열어주셨다. 중풍병에 걸린 여인이 걷기 시작하였고, 7년동안 마비상태에 있던 남자가 고침을 받았다. 무당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우상을 불태우며 무당일을 끊어버렸는가 하면, 너무나 유명한 알코올 중독자가 회심을 하였다. 이 모든 소식이 그 작은 지역에 퍼지자, 갑자기 성도가 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곧 다른 천막을 기존의 천막 옆에 연결하여 나무합판으로 옆을 연결하였고 신문지로 합판을 도배하였다.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하려고 중앙에는 올챙이배 모양의 난로를 놓았고, 그 밑에는 쌀가마니를 펼쳐 놓았다.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며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우리 넷이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 손은 따뜻해져갔고, 우리의 마음 또한 서로에 대한 우정 속에 따뜻해져갔다. 조 전도사는 천막교회 성도가 2백50명이나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조 전도사의 사역이 계속 성장하기를 격려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조용기 전도사가 교단을 떠났을 때 자신들이 얼마나 좌절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몇몇 한국 목회자들간에 정치적 분쟁이 있었는데, 그 때 성도수가 얼마 되지않는 한 목회자가 내가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시내 부지를 불법적으로 점거한 것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조 전도사에게 말하자, 그는 분열에 끼어들기 원치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여름부흥회에서 나를 위해 통역을 하는 동안 신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의 신유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들보다 강한 지금, 다른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났고 자신들은 독립 사역자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눈길을 걸으며 돌아오는 가운데 근처 가까이 있던 낡은 천막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주 미약한 시작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있었다.
 선교사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1960년 그 해 겨울에는 해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계속>

 

기사입력 : 2003.05.30. pm 15:29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