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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창립 45주년 - 순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Ⅱ)

 

 

 

 

 

 

 

 

 

 

 

황량한 모래 언덕에서 일군 세계최대의 기적


1973년 각고끝에 새성전 완공 … 성장 가속화
세계선교의 기틀 마련 … 순복음 깃발들고 선교사 파송


쓸쓸한 모래섬에 불과한 여의도에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그러나 여의도의 성전건축은 국내외적인 정세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심한 난관에 봉착했다. 석유파동으로 인해 건축 자재값은 폭등하고, 국가경제는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은행과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은 매일 이어졌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건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용기 목사는 뼈대만 올라간 앙상한 성전 지하실에서 뚝뚝 떨어지는 녹물을 맞으며 거의 매일 밤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하다가 지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전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교회 살리기 운동’을 일으켰다. 매일 저녁 수백명의 성도들은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싸우며 지하실 바닥에서 엎드려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성도들은 온 정성을 모아 교회건축헌금을 드리기 시작했으며 그 열기는 가속화되었다.
 이처럼 조용기 목사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의 결과로 교회는 조금씩 빚을 갚기 시작하고 드디어 1만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전이 완공되었다. 1958년 5월 18일 대조동에 천막을 치고 5명이 첫 예배를 드린 후 14년 만의 일이었다.
 여의도 성전은 4천여 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3천2백 평의 규모로, 시멘트 6만6천 포대, 벽돌 1백65만장, 철근 4백톤, 철골 2백50톤, 총 공사비 8억4천1백만원이 소요되었으며, 공사 시작 3년 4개월 만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73년 8월 19일 마침내 여의도 성전에서 감격적인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때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옮겨 온 성도들은 모두 8천여 명이었다.
 여의도 이전 후 한달이 지난 1973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P.W.C., Pentecostal World Conference)가 효창운동장과 새롭게 건립된 여의도성전에서 개최되었다. <복음증거와 성령의 은혜>라는 주제로 열린 P.W.C. 서울대회에는 전 세계 39개국에서 2천여 명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참석했고, 국내에서는 5만여 명이 참석했다.
 1973년 9월 23일 여의도성전의 헌당예배가 드려졌다. 여의도성전의 완공은 고난을 겪고 일어선 성도들로 하여금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7년 1월에는 1년여 동안의 공사를 통해 지상 10층 규모의 세계선교센터(현 제1교육관)를 건립했으며, 7월에는 교회창립 20주년을 기념해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81년에는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의 세계선교센터(현 제2교육관)를 건립해 오늘날 세계선교의 선봉장으로서의 확실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이와 함께 교회는 계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여의도로 교회가 이전된 이후 매년 1만명 이상의 새로운 성도들이 교회에 등록을 했으며, 급기야 1979년 교회 창립 20여 년만에 10만 성도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1981년 11월 말로 교세는 두 배로 증가해 20만 성도를 돌파하게 되어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세계선교의 막중한 사명을 절감한 조용기 목사와 당회는 1975년 4월 1일 순복음세계선교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본격적인 해외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75년 5월, 나성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와 16명의 선교사들이 모인 가운데 순복음북미연합회가 결성되었고 초대회장에 박여호수아 목사가 임명됐다. 한편 이에 앞선 1971년 12월 본 교회에서는 최초의 선교사 파송식이 있었다. 순복음세계선교회는 선교지로 파송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초청하여 선교보고와 함께 그 동안의 수고에 대한 위로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순복음세계선교대회이다. 제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는 1975년 5월 미국 나성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개최되었으며, 1977년 5월 국내에서 순복음세계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본 교회 성도들은 선교사역을 위해 선교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교회성장연구기구인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가 1976년 11월 4일 조용기 목사를 총재로 본 교회에 설립되었다. C.G.I.는 본 교회에 본부를 두고,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전 세계에 그 지부를 두어 활동하고 있으며, 본 교회의 발전 과정을 모델로 하여 각국의 교역자 및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세미나를 통한 연구와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1978년, 조용기 목사의 마음속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복음화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본은 기독교가 상륙한 지 2백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본 교회의 성도수는 평균 15명에 불과한 복음의 황무지였다. 이렇듯 복음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 전체 국민의 10%인 1천만명을 복음화해 잠자는 일본을 깨워 회개시키려는 것이 본 교회에서 실시한  ‘일본 1천만 구령운동’의 취지이다.  이를 위해 조용기 목사는 매월 정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말씀을 증거하였다. 성회 때마다 수많은 결신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의 선교사역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순복음세계선교회 유럽지구연합회가 조직된 이래 개신교 최대의 집회가 1978년 4월 27일 독일의 칼스루헤에서 개최되었다. 이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대성회가 개최되었다. 또 1978년 10월 9일부터 한 달 동안 조용기 목사는 미국 산호세,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했다. 이와함께 아시아와 남미 지역에도 성령의 불길이 이어졌다. 1978년 12월 태국, 1982년 2월 싱가포르, 필리핀에서 대성회가 개최되었다. 1979년 1월에는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중남미 사상 최대의 교역자 세미나와 성회가 열렸으며, 엘살바도르에서도 성령의 열기는 계속되었다.
 1973년 3월 7일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오산리에 금식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초교파적인 기도원이 설립되었다. 이후 많은 교인들이 찾아와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은혜와 성령충만함과 함께 갖가지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몇차례의 증축과 보수를 거친 기도원은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어갔다. 1991년 1월에는 기도원의 설립과 운영에 헌신적인 기도와 공헌을 한 최자실 목사의 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기도원의 명칭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바꾸었다.
 1976년 3월 10일 본격적인 문서선교사역의 기반이 닦여졌다. 영산출판사가 설립돼 각종 신앙서적과 교재를 출간하기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978년 10월 8일에는 문서를 통한 복음 전도를 더욱 폭넓고 효과 있게 하기 위하여 <순복음뉴우스>를 창간하였다. <순복음소식>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본 교회 성도들은 물론 전국의 교회와 기관, 심지어 교도소와 병원 등에까지 전해지며 전도지로서, 복음지로서 역할을 해 오다가 1992년 1월부터 본 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대폭 확대 개편해 <순복음가족신문>이라는 제호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순복음소식>지가 담당하던 전도지로서의 역할을 새로운 제호의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여 복음전도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오순절 신학의 정립과 확산,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순복음교육연구소가 1978년 12월 27일 설립되었다. 연구소에서는 성도들의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평신도 성경학교를 개설했으며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오순절 신학을 알리고 정착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 심리적 갈등과 신앙문제, 가정문제, 대인간의 관계 등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1974년 상담소를 개설했다. 1986년에는 10분 설교 전화를 개통해 언제 어디서나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전화로 들을 수 있게 했다.
 1974년 4월 20일 조용기 목사를 총재로,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가 창설돼 모든 실업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이게 됐다. 선교회는 총재 조용기 목사의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사역을 뒷받침하며, 선교사업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홀트아동복지회 지원과 군선교, 사회사업선교 등을 활발히 전개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1984년 1월 교회는 명칭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꾸었다. 10월에는 40만 성도가 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으며 1985년에는 50만으로 성장했다. 이어 조용기 목사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로 피선되던 1992년 즈음에는 70만 성도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해외의 관심은 미국의 타임지를 비롯한 각국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교회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성전증축공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성전의 증축공사가 1983년 1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사가 1985년 말 마무리됨으로써 2만 5천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아줌마’로 더 많이 알려졌던 최자실 목사가 1989년 11월 9일 소천했다. 평소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을 외치며 1983년 11월 정년은퇴식을 가진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선교에 주력했던 최 목사는 자신의 말처럼 선교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최자실 목사의 장례는 1989년 11월 15일 본 교회장으로 치뤄졌으며 유해는 오산리기도원에 안장되었다.
 1983년부터 우리교회는 적극적인 해외 선교 방침으로 교포 위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원주민들에게 선교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했다. 대공산권과 중국선교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제3세계 선교에도 중점을 두고 선교 사업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1992년 6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 연인원 4만여 명이 참석, 1만 5천여 명 결신이라는 놀라운 결실을 맺은 대성회가 개최되었다. 조용기 목사는 92년 9월 9일부터 13일까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제16차 세계 하나님의 성회 대회에서 60개국의 3천만 성도를 가진 세계하나님의성회연합회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1993년 2월에 우리교회는 세계 최대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선정되어 기네스북에 기록돼 기록인정서를 받았다. 이에 앞서 미국의 종교 전문잡지인 <크리스천 월드>가 발표한 세계 50대 교회에 본 교회가 세계 1위로 선정되었다.
 1982년 시작된 ‘나누어갖기 운동’에 이어 1984년 3월부터 본격적인 사랑의 실천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본 교회는 청소년을 위한 사랑의 도시락 전달, 심장병 환자 시술 사업, 엘림복지타운 건립, 사랑의 헌혈 운동, 은혜의 빵 나누기 운동, 의류 수집 운동, 국내외 난민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1988년 복음실은 종합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문서 선교의 역할과 민족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며 1천 2백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매스컴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사랑, 진실, 인간’을 사시로 하는 국민일보는 하나님 편에서의 시각으로 이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국방,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재조명하며 공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85년 1월 8일 순복음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90년에는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여 순복음신학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1년 신학대학원 개설인가와 더불어 1993년 순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발전 속에 1997년 9월 한세대학교로 교명이 재차 변경되어 오순절 성령운동의 세계적인 인재양성의 사명과 기독교 정신으로 헌신된 지도자 양성의 소명을 가지고 세계적인 기독교 대학, 정신과학 대학으로서의 종합대학으로 오늘날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기사입력 : 2003.05.10. am 09:34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