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밭에 세워진 천막… 세계최대교회 초석
한국전쟁 이후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소망 심어줘
5명으로 시작, 강력한 성령운동 바탕으로 급성장
1958년 5월 18일 설립된 우리교회가 창립 4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45년을 돌이켜 보면 수많은 시련과 영광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장을 계속해 온 결과 오늘날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당회장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70만 성도의 눈물의 기도의 결과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교회창립 45주년을 기념하며 교회의 역사를 상고하고 21세기 우리교회의 비전을 다시 한번 품는 계기를 마련했다. <편집자 註>
한국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년이 지났을까. 하루 끼니조차 제대로 연명할 수 없었던 1950년대 후반, 서울 대조동에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어 어느새 인근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곳은 닳아서 군데군데 찢어진 군용천막 속이었다.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이었던 대조동 천막교회다.
교회의 첫 시작은 1958년 5월 18일 최자실 전도사의 집에서 드린 가정예배였다. 창립 예배에 초청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날 참석자는 5명이었다. 최 전도사와 자녀 세명을 제외하면 정작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할머니 한 명 뿐이었다. 이날 설교를 한 조용기 전도사에게 최 전도사는 성도 30명이 될 때까지만 사역을 도와줄 것을 제안, 동역이 이루어진다.
사실 창립멤버인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전도사의 꿈은 교회개척이 아니었다. 고아에 대한 사명을 갖고 있었던 최자실 전도사는 하나님의성회에서 지을 고아원 경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소망을 품고 있던 최 전도사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주셨다. 고아원 부지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육의 고아만이 아니라 영의 고아도 고아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그래서 최 전도사는 대조동 흙벽 집에서 동네아이들을 모아 찬송과 성경말씀을 가르치게 되었다.
조용기 전도사 역시 신학교 졸업 후 잠시 존스톤 선교사 집에서 기거하며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최 전도사의 고아원 소식을 듣게 된 조 전도사가 그곳을 방문했는데 흙벽 집에서 아이들의 이를 잡아주는 최 전도사의 딱한 모습을 보다 못해 여러 가지를 도와주게 되면서 함께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역 후 1개월쯤 지난 어느 날 한 사건이 일어난다. 7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의 얘기를 들은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방문, 안수기도를 했을 때 신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무성이 엄마로 통하던 그 여인의 일은 곧 온 동네에 대단한 화제를 뿌리게 된다.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일은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부흥을 예고했다. 신유 소문을 들은 수많은 병자들이 교회를 찾아오면서 기적은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무당이 변화되어 교회에 나오고 교회를 핍박했던 동네 불량배들도 하나 둘 교회 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의 땀의 결실로 성도는 50명에 이르러 이제 최 전도사의 거실에서의 예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천막교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아예 교회에서 생활하는 성도들도 많았다. 야산에 아궁이를 파고 숙식을 해결하면서 겨울에도 새벽 1, 2시까지 기도하며 새벽 4시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낮에 북을 치는 전도에도 열심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막교회의 재정은 부족했다. 조용기 전도사가 신학교에서 통역을 하고 당시 서울예고 1학년에 재학중이던 최 전도사의 딸 성혜 양이 피아노 개인 레슨을 해서 벌어온 것이 유일한 수입이었다. 교회 재정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신문에서 복권추첨 소식을 접한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는 복권당첨을 꿈꾸기까지 했다. 복권추첨에서 떨어져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조용기 전도사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목회를 못하겠다는 조용기 전도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동양극장을 보여주면서 더 큰 예배당을 주겠다는 약속을 응답하신 것.
그렇게 맞이한 1961년 새해. 조용기 전도사에게 입영통지가 날아왔다. 이제 겨우 기초를 다지고 있는 천막교회에 조용기 전도사의 부재는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조 전도사의 뒤를 이를 목회자를 놓고 밤낮으로 부르짖었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입영 날짜 이삼일을 남겨둔 어느 날 부산에서 존 허스톤 목사가 찾아왔다. 기도만 하면 천막교회에 가보라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조 전도사의 사정을 듣고 허스톤 목사는 흔쾌히 천막교회의 후임 사역을 약속했다.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조용기 전도사는 침례 준비에 힘을 쏟았다. 4월 첫 주 부활주일 수색 강변에서의 세례식은 너무 추웠다. 매서운 봄바람을 맞으며 봄비까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2시간이나 찬물에서 세례식을 진행한 조용기 전도사는 귀대 후 탈장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열과 폐렴까지 겹쳐 어려운 고비를 넘긴 조 전도사는 7개월만에 의병제대를 한다. 조 전도사가 제대하고 교회로 돌아오던 날 천막교회는 흡사 잔치집 같았다. 교회의 성장은 거듭됐다. 당시 교인 수는 4백명이 넘었다. 하지만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에게 제2의 개척을 준비하는 중요한 결단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961년 11월 서대문 순복음 부흥회관이 완공되면서 6백여 명의 교인들은 새로운 교회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1천5백명의 좌석을 만들고 1962년 2월 18일 조용기 전도사와 성도들은 헌당예배를 드렸다. 다음해 4월 26일 조용기 전도사는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명칭을 「순복음중앙교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단순한 부흥회관에서 강력하고 단단한 교회로 성장하기 위함이었다. 교회가 자리잡게 된 후 교회는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여 송재덕 집사를 비롯해 5명을 집사로 임명했으며 2년 뒤인 1964년 2월 16일 추가로 33명을 집사로 임명했다. 또한 1966년 4월 5일에는 김응호 외 6명을 장로로 임명하여 교회 건립 후 처음으로 당회를 구성하고 비로소 조용기 목사를 당회장으로 하여 교회치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본 교회는 1975년 장로들의 화합과 친목을 위해 장로친목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송재덕 장로를 임명하고 지금까지 50개 분과위원회를 구성, 현재 분과별로 교회성장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서대문교회가 이전한 지 3년째인 1964년에는 교인 수가 3천명에 육박하는 성장을 가져와 세계적인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된 구역이 조직되었다. 1964년은 교회에 매우 중대한 시기였다. 늘어난 교인으로 인하여 예배는 4부로 나뉘어 드려졌고 매일 평균 15명 이상의 교인이 늘어났다. 날로 증가하는 성도들로 인하여 조용기 목사는 새롭게 교회 조직을 구성하고자 하여 기도 끝에 20여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구역을 발족하고 그들을 구역장으로 임명했다. 조용기 목사는 원활한 운영을 위해 예배와 모임 등에 새로운 지침을 정해 이행하도록 지시했으며 구역원이 15명 정도가 되면 분리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구역예배를 가질 때마다 교회에 제출할 예배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이리하여 구역조직은 마침내 성장하고 안정되어 1967년에는 수백개의 그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남성구역은 1968년 이철인 집사(현 원로장로)에 의해 5명이 모여 처음 모임을 시작했다. 여성구역의 성장에 도전을 받은 남자 성도들의 관심은 점점 뜨거워져 30명까지 넘치는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앞서 서대문 네거리에 부흥회관이 건립된 후 성도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해 8백명으로 증가하던 1962년 3월을 전후해 남성 성도들은 송재덕 집사를 비롯해 여러 명의 남성집사들이 모여 남친목회를 본격적으로 결성하여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오늘의 남선교회를 이루는 모태가 되었다.
1964년은 본 교회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연 계기가 된 해였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조용기 목사는 대조동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한 지 6년만에 최초로 해외선교여행을 떠났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그 시절 조용기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측으로부터 <미국하나님의성회 교단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을 바란다는 내용의 초청장을 받은 뒤 1백달러만을 지닌 채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최초의 미국 선교여행길에 올랐다. 미국하나님의성회 교단창립50주년 기념식에 한국 하나님의성회 대표자격으로 참석해서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의 상황과 비전을 제시하고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전함으로 큰 박수갈채를 받은 조용기 목사는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잿더미 속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한국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메시지를 선포해 각국에서 참석한 하나님의성회 대표들에게 큰 감명과 도전을 주었다.
같은 해 뜻밖의 일본왕복 비행기표를 선물 받은 최자실 전도사는 10월 28일 일본여행길에 오르면서 일본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최 전도사의 첫 일본 선교집회는 동경지방을 중심으로 비자를 연기하며 40일간 계속되어 현재 일본선교의 물꼬를 텄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1967년 5월 31일 세계오순절총회에 아시아대표로 참석하고 또 전세계18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백여 일간의 일정으로 제2차 선교여행길에 올랐다. 선교여행중 조 목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스, 이스라엘, 이란, 태국, 미얀마, 베트남, 중국, 일본 등 18개국 30여개 도시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귀국했다.
한편 1968년 4월 21일 남친목회는 나날이 확장해 교회의 기대에 부합하여 발전적이고 체계적이며, 전문화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총회를 통해 순복음중앙교회 남선교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조용기 목사의 「나의 5분간」이라는 책을 3천부 발간하여 문서전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선교회와 공동으로 심령대부흥성회를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여전도회에서는 1968년 태국에 교회를 세우고 매월 선교비를 지원하기 시작해 세계선교를 위한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그리고 해외신학생들과 국내의 신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며 훌륭한 주의 종이 되도록 후원하는 일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여전도회는 정기총회를 통해 명칭을 부인선교회로 변경했다. 그리고 조직부와 섭외부를 추가로 조직해 선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주희·조양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