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삼일만세운동 전개
원산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성령운동 확산
절제 운동 전개하면 국민 계몽에도 앞장서
시대가 고통스럽고 어려울수록 한국의 기독교 사역은 빛을 발했다. 이는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뒤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에서 그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 활동은 민족의 위기 앞에 분연히 일어서 기도하며 나아간 모범적 사례라고 하겠다.
한국 기독교사에서 부흥운동의 시초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서 시작된다. 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중국 여선교사 화이트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성도, 침례교 선교사들도 참여한 연합 기도회 형식으로 발전됐다.
한번은 캐나다 출신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3년 동안 강원도지역에서 선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우월의식, 자만감, 권위주의 때문이었음을 털어놓았다. 이는 한국 선교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다. 1904년 1월 기도모임에서는 롭 선교사가 성령 체험을 하고, 전계은, 정춘수 등이 은혜를 입어 부흥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원산 부흥운동은 평양으로 이어졌다. 1906년 여름 평양주재 선교사들의 주도로 사경회가 열리고 장대현교회 길선주 장로가 주도하는 새벽기도회도 계속 됐다. 전남 목포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남감리회 소속 저다인 선교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 교인들이 앞다투어 회개하기 시작한 것. 본격적인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다. 매년 개최되던 장대현교회 사경회가 9일 동안 계속되면서 거대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참석자들이 각자의 죄-거짓, 불신, 폭행, 술, 담배, 노름 등-의 행동을 회개하고 사회적으로 윤리적 갱신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는 등 적극적인 실천에 들어갔다.
이같은 대부흥 운동은 개개인이 신앙성숙과 행동변화를 몰고 왔다. 기독교는 특히 일본의 침략으로 어둡고 힘든 생활을 영위하던 백성들에게 민족의 길잡이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교회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었다. 기도를 한 윤창석을 비롯해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서 춘, 김상덕, 이종근, 송계백 등 감옥에 수감된 학생들은 믿음과 기독교 신앙이 투철했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는 1천 7백만명이었다. 그중 기독교인은 불과 30여 만 명 이었는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 운동 뒤 일본은 지배정책을 문화정책으로 바꾸었다. 퇴폐문화로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기독교에서는 이에 대한 대항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 사이에 잠시 일어났던 절제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이렇게 신사참배와 정면으로 맞서며 3·1 운동의 중심세력이 된 기독교에 대해 일본정부의 박해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2백여 곳의 교회가 없어졌으며 2천여 명의 성도가 투옥, 50여 명의 목회자들이 순교하면서 일제치하에서 기독교는 나라사랑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