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파 화해 위해 힘쓴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종교개혁자였다. 그는 도미닉 교단의 탁발 수도사였으나 교단을 떠나 1522년에는 전직 수녀와 결혼했다. 그는 1523년에 스트라스부르로 갔고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부처는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파 교회를 연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분리되어 있던 쯔빙글리파와 루터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시도했다. 이후 멜랑흐톤과의 논쟁을 통해 비텐베르그의 협화 신조(Concord)에서 성만찬 논쟁을 평화적으로 이끌었다. 부처는 하겐아후, 보름스, 라티스본에서 가진 가톨릭과의 협의회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처는 황제의 종교적 결정에 항거했다. 1549년에 그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영국 캠브리지로 가야만 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크랜머가 ‘공동 기도서’를 발간하는 일에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청교도주의를 지향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51년에 죽었으나 메리 여왕 치하의 가톨릭 반동 기간 중에 시신이 다시 파헤쳐져 불태워졌다. 부처는 성경 주석을 많이 썼고 여러 교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했다.